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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해적”에 대하여

장화 신은 고양이 2021. 3. 27. 21:44



2020년 11월 초연에 이어 두 번째로 무대에 올려진 국립발레단 “해적”이 2021.3.28일까지 공연된다.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해적”의 그 유명한 파드트루아(3인무)를 갈라쇼에서 가끔 볼 수 있었을 뿐, 작품 전체를 대할 기회가 없다가 작년에야 원작에 상당 부분 수정을 가한 형태로 국내 최초 전막 공연이 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토록 늦게서야 전막이 선보여진 이유가 무엇일지 내 나름대로 답을 생각해 봤는데, “백조의 호수” “지젤” “라 바야데르” 등 잘 알려진 대작들에 비교하면 원작의 만듦새가 상당히 허술하다는 것이다. 줄거리가 무언가 일목요연하지 못하게 뒤죽박죽 얽혀 있고 에피소드의 연결에서도 개연성이나 논리가 부족하다. 발레 공연이 보통 2시간 가까이 이어지는데 관객들이 하품을 참으며 매끄럽지 않은 허술한 스토리가 어서 지나가고 유명한 파드트루아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게 된다면? 즉 기존작을 그대로 무대화하자니 흥행이 의문시되는 작품 완성도가 문제이다.

이 문제를 이번 국립발레단 “해적”에서 해결하려 고심한 흔적이 나타난다. 줄거리의 흐름이 앞뒤로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늘어지지 않도록 굳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을 덜어냈고 순서도 바꾸었다. 국립발레단은 이전에도 다른 작품에서 비슷한 작업을 한 경험이 있다. 3막짜리 “돈키호테”를 어린이 대상으로 공연하기 위해 1시간 이내의 축약 버전을 만들어 “해설이 있는 발레”라는 프로그램을 장기간 운영했다. 이번에 선보인 “해적”의 전체 러닝 타임은 외국의 기존 버전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2시간 내외이지만 개작의 결과 스토리의 속도감이 부여되어 작품의 부피가 줄어든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해적”의 원래 줄거리는 해적 두목 콘라드가 노예 시장에서 터키의 파샤에게 팔려 간 그리스 여인 메도라를 구출한다는 내용인데, 국립 버전에서 여기에 상당한 수정을 하였다.

초연 당시 배포한 프로그램 북을 보면 작품의 기획의도가 잘 설명되어 있는데 책자를 아깝게도 잃어버렸다. 기억을 짚어보면 “ 유럽은 이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안티테제로 활용하였고...”라는 대목이 있었다. “해적”의 원작에도 반영되어 있었을 비서구 지역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우리가 그대로 취할 이유가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노예시장, 그리스인 노예, 파샤의 궁전 등의 설정을 모두 삭제한 후, 주인공과 반대편에서 악역을 맡는 역할을 가상의 국가인 마젠토스 왕국의 왕에게 부여했다.

그 결과 원작의 배경이자 작품의 역사적 맥락이 소거된 “해적”은 주인공이 위험을 이겨내고 보물이나 공주를 얻는 어드벤처 스토리 다시 말해 인류보편 모험서사를 여집합으로 남기게 되었다. 현대의 가치와 충돌하는 원작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버린 국립발레단 “해적”은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감정적으로)편안하고 (정치적으로)안전한 작품이다.

발레는 그저 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발레 역시 현실과 교접하며 모습이 바뀌어감을 확인한다.
중동을 위시한 이슬람권이 오늘날 세계정치의 화약고가 되어 있고, 국내에도 이슬람 배경의 거주민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슬람을 타자화하는 태도는 개방된 국가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원작에서 중요한 장면이었던 오달리스크(하렘의 여인)의 춤이 개작을 하며 삭제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립 버전의 “해적”은 기존작으로부터 제목, 안무, 음악, 캐릭터 등 기본적인 재료를 빌려왔으나 근본적인 세계관에 수정을 가해지면서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 아닐까. 음악과 안무를 일부 고치는 마이너한 버전업이 아니라, 스토리에 흐르는 유럽적인 역사관을 버리는 중대 수정을 한 것은 유럽의 원작을 우리가 애써 이해하는 대신 우리가 보기에 적합한 새 작품을 만들어버린 것에 가깝다고 하겠다. 국립발레단 “해적”이 국내관객에게 파고드는 것을 넘어 외국에서 만들어진 기존 버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지 여부는 작품 자체의 업그레이드 뿐 아니라 이 시점에서 한국이 세계에 던지는 문제의식에 세계가 얼마나 호응하는가에 좌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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