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작을 앞서버린 파생창작물의 인지도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이 원작보다 더 인기를 얻는 일은 상당히 많고 결국 원작의 존재감을 대체해버리기도 한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이 유명하지만 원작은 이제 문학전공자만 읽는다. 독서가 아무래도 개인적인 행위라면 공연은 집단적인 활동으로 파급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책의 인기에 올라타 공연물이 제작된 후, 공연물의 인기가 책의 인기를 뛰어넘으면서 원전은 밀려나고 원작의 파생물이 더 강한 생명을 획득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문화현상이다. 2. 발레 호두까기인형과 E.T.A 호프만 지난 크리스마스에 국립발레단 송년발레 호두까기인형을 보러 외출한 날, 먼저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샀다. 크리스마스 마케팅으로 이 즈음에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책들 중에 호두..
국립발레단 제195회 정기공연 ‘돈키호테’ 23. 4. 12 수 ~ 23. 4. 16. 일 예술의전당 안무/ 마리우스 프티파, 재안무/ 송정빈 4월 12일부터 이어지고 있는 국립발레단의 돈키호테 공연이 이제 오늘 오후 2시 막공 한차례만 남겨두고 있다. 지난 5일간 공연을 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 새로운 작품이 이미 적잖이 입소문을 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말에서 짐작되다시피 금번 무대에 오르게 된 돈키호테는 지금까지 국립발레단을 포함 국내의 발레단이 선보여 온 것과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안무가 송정빈씨에 따르면 새로운 개작에서는 기존작에서보다 돈키호테의 비중이 늘어났고 이야기의 개연성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작품의 소개는 국립발레단의 홈페이지에서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자세한..
이 글의 첫 줄을 쓰고 있는 3월 8일 밤 11시 현재, 4일간 예정으로 한국에 찾아온 파리오페라발레의 ‘지젤’ 내한 공연 첫 날이 깊은 여운 속에 끝났을 것이다. 서울보다 앞서 대전에서 공연을 본 분들의 말에 따르면 무용수의 기량이나 무대예술의 수준 등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다만 고가의 티켓이 부담스러운 탓인지 발레단의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객석이 완판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 이런 것을 보아도 예술에 국민이 접근하기 위해 국립예술단체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1. 발레의 원본을 찾아서 개인적으로 만만치 않았던 티켓값을 지불하고 이번 공연을 보기로 한 것은 발레의 본산지인 프랑스의 파리오페라발레가 ‘지젤’의 원본을 더 나아가 ‘발레’의 원본을 보여 줄 것이라는..
1. 늦가을 밤, 국립발레단 ‘지젤’ 공연을 보는 재미 중 하나는 막이 내린 후 돌아가는 길에 얼핏얼핏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를 스쳐가듯 듣는 것이다. 엄마와 딸이 나누는 이야기, 연인들끼리 오가는 인물평 같은 것들이다. 짧막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대화들 속에 사람들이 작품을 어떻게 감상했는지 잘 드러난다. 전형적인 패턴은 이런 것들이다. 1막과 2막 중 어느 편이 더 맘에 들었느냐? 등장인물 아무개는 대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느냐? 지난 토요일 밤, 국립발레단의 지젤이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린 딸은 1막이 재미있었다 하고, 어머니는 발레리나들이 하얀 옷을 입고 춤을 추던 2막이 좋더라는 식이다. 성인 관객들은 아이어머니처럼 발레를 춤으로서 감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어린이들은 인물과 스토리..
방역 상황이 다시 심상찮게 흘러가는 걸 보니 솔직히 체념에 가까운 마음이 듭니다. 모르는 곳을 찾아가다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방향을 돌리려는 그 무렵이 목적지 근처일 때가 많다지요. 바로 지금이 팬더믹의 종식을 앞둔 마지막 고비이기를 바라며 다소 무거운 마음이지만 오랜만에 글을 이어가보겠습니다. 독일 베를린발레단이 올 겨울에 호두까기인형을 공연하지 않기로 했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2막의 캐릭터 댄스 중 중국인의 춤이 동양인을 비하하고 있다는 비판을 수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현지의 분위기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당연한 결정이라는 의견이 대세인 듯합니다. 학창시절에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려면 최신곡을 부르던지, 옛날 노래를 부를 바엔 아예 진짜 오래 전 노래를 불러야지 어중간하게 유행 지난 지 몇 년..
11월을 맞기 직전, 가을비가 내리던 토요일 밤, 기나긴 코로나 시대에 조용히 마침표를 찍듯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발레 지젤이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4층까지 빽빽하게 채운 관객의 열기는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는지 저도 모르게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게 되더군요. 장소가 생명을 가지는 것은 그곳을 찾는 사람이 있기 때문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마침 그 무렵은 할로윈이기도 했는데 처녀 귀신들의 아름다운 군무로 유명한 지젤을 무대에 올린 것은 우연인 듯 절묘한 작품 선정이었습니다. 할로윈이야 서양에서 유래한 관습으로 생소하달 수도 있으나 죽은 자의 혼이 산 자와 함께 한다는 믿음 자체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존재합니다. 우리에겐 추석이란 명절이 있어 가을걷이를 끝낸 후 수확물을 가지고 조상신들에..
2020년 11월 초연에 이어 두 번째로 무대에 올려진 국립발레단 “해적”이 2021.3.28일까지 공연된다.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해적”의 그 유명한 파드트루아(3인무)를 갈라쇼에서 가끔 볼 수 있었을 뿐, 작품 전체를 대할 기회가 없다가 작년에야 원작에 상당 부분 수정을 가한 형태로 국내 최초 전막 공연이 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토록 늦게서야 전막이 선보여진 이유가 무엇일지 내 나름대로 답을 생각해 봤는데, “백조의 호수” “지젤” “라 바야데르” 등 잘 알려진 대작들에 비교하면 원작의 만듦새가 상당히 허술하다는 것이다. 줄거리가 무언가 일목요연하지 못하게 뒤죽박죽 얽혀 있고 에피소드의 연결에서도 개연성이나 논리가 부족하다. 발레 공연이 보통 2시간 가까이 이어지는데 관객들이 하품을 참으며 매끄럽지 ..
근 한 달 간 손에서 놓고 있던 이 주제를 이번 꼭지로 마무리할 생각이다. 한국의 근대적인 공연 시설은 당연하게도 서구에서 유입된 문화이고, 서구의 대규모 공연장이란 절대왕권의 위용을 보여주는 시설이었거나 시민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층의 여유와 교양을 과시하는 장소였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다. 유럽 역사의 흐름에서 시민 혁명을 주요 분기점으로 꼽곤 하는데 그들의 혁명에는 어떤 이중성이 목격된다. 시민이 역사의 주역이 되기 위해 앞 시대의 지배자였던 왕과 귀족의 정치, 경제, 군사적 기득권은 철저히 해체한 반면, 귀족문화는 전리품으로 취득하여 부르주아 계층 자신들의 문화적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앞에서 연주하던 모차르트의 음악을 더 많은 시민들이 듣게 되고, 궁정에서 다듬어진 어용 ..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같은 시설에서 무대에 오르는 예술의 주종은 보통 일반 대중이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장르이다. 이 글에서 ‘클래식’을 엄밀하게 정의할 필요는 없어 보이며, 대중예술과 반대편에 있다고 믿어지는 성악, 기악, 오페라, 발레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유럽의 근세 이후부터 교회, 왕실, 귀족의 비호 속에서 발달하고 근대 이후 부르주아 시민 계층이 향유하다가 현대에 들어와 서양 예술의 고전으로 취급받게 된 장르와 그 작품들이 ‘클래식’이라는 단어로 축약되어 한국인의 의식 세계에 들어왔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이른바 ‘클래식’이 선보여지던 곳은 왕궁, 귀족의 저택 등이었고 어떤 면에서 서양의 고전 예술은 한때 권력과 공생하는 어용 예술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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