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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같은 시설에서 무대에 오르는 예술의 주종은 보통 일반 대중이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장르이다. 이 글에서 ‘클래식’을 엄밀하게 정의할 필요는 없어 보이며, 대중예술과 반대편에 있다고 믿어지는 성악, 기악, 오페라, 발레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유럽의 근세 이후부터 교회, 왕실, 귀족의 비호 속에서 발달하고 근대 이후 부르주아 시민 계층이 향유하다가 현대에 들어와 서양 예술의 고전으로 취급받게 된 장르와 그 작품들이 ‘클래식’이라는 단어로 축약되어 한국인의 의식 세계에 들어왔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이른바 ‘클래식’이 선보여지던 곳은 왕궁, 귀족의 저택 등이었고 어떤 면에서 서양의 고전 예술은 한때 권력과 공생하는 어용 예술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발레가 그러한데 절대 왕권의 보호 속에서 발전했다는 역사로 인해 진지한 예술로 여겨지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이 소수 지배층에 한정되었던 시대에 모든 예술은 순수 예술이면서 동시에 후원자인 왕과 귀족에게 봉사하는 도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술이 지배층의 위용을 보여주는 소프트웨어의 하나라면 그것을 공간적으로 담아내는 하드웨어는 웅장한 궁전이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 오스트리아의 쇤브룬 궁전 등은 오늘날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 취급을 받지만 당대에는 지배자의 본산으로서 국왕을 알현하러 올라오는 지방귀족과 수도시민을 정신적으로 제압하는 장치였다. 시골에서 볼 수 없는 거대한 건물과 정교한 장식을 갖춘 궁전에서 수도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을 선보이는 것은 단지 예술적 동기만이 아니라 정치적 동기가 다분한 행동이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당시 예술을 무대에 올리던 공연장이 왕국을 닮은 건축물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시민혁명으로 왕과 귀족의 시대가 가고 시민의 시대가 열렸으나, 과거 지배자의 문화는 시민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생명력을 이어갔으니 그들은 지난날 귀족이 즐기던 음악연주, 오페라 등을 궁전만큼 크고 화려한 공연장에서 감상했다. 파리의 명소 가르니에 극장은 불어로 Palais Garnier, 즉 궁전이다.

공연장은 새 시대의 주류가 된 시민들이 취향을 매개로 한곳에 모여 정체성을 확인하는 곳이고 동시에 그 안에서 계층을 재분류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산업혁명의 진행이 극심한 불평등을 낳던 시대에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거대한 공연장 출입문은 그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자를 1차로 분류하고, 일단 입장한 사람들도 재력에 따라 좌석을 선택한 결과 최종적으로는 각자의 좌석층수가 사회경제적 위치를 상징하게 된다. 서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란 것의 실제가 무엇이었나를 보려면 정치철학적 수사 대신 19세기 대중이 모이던 공연장같은 공간을 보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한다.

바로 직전 왕정의 시대에 평민으로 불리던 19세기의 노동자는 왕궁을 닮은 공연장의 위압감에 다시 한번 튕겨나간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이제 보이지 않는 허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릴 때부터 접해야 몸에 배는 취향, 로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방식, 경험하지 않은 자는 알 수 없는 매너, 그리고 그들만의 드레스코드.

드레스코드란 일부 공연에서 분위기를 고양시킬 목적으로 관람자들이 복장의 컬러, 양식을 통일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드레스코드를 지정한 공연은 한 번 경험했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로린 마젤의 신년음악회의 드레스코드가 블랙이었다. 19세기 도시의 노동자, 시골 농부는 드레스코드는 커녕 그들의 일상복으로 파리오페라발레극장 입구를 무사히 통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위험수위에 도달하던 19세기 말, 마르크스는 돈을 빌리려고 전당포에 코트를 맡기고 도서관에 갔다가 수위에게 쫓겨났다. 다음 날, 전당포에 맡긴 코트를 다시 찾아서 입고 가자 이번에는 무사통과였다!!

(계속)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 베르사유 궁전
파리의 명소, 오페라 가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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