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발레리나를 그린 화가 드가(완결)

장화 신은 고양이 2020. 11. 1. 17:04



1.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는 예술가

어쩌다가 시리즈가 되어버린 이 글은 드가의 화가로서의 궤적을 좇고 있다. 1편에서는 카메라가 회화의 영역을 본격적으로 침범하기 전에 드가가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우연, 즉 ‘적당한 때’를 잡은 행운에 대해, 2편에서는 당시 대중이 사랑하는 발레를 늘 접할 수 있는 파리에 살았던 우연, 즉 ‘적당한 장소’에 있었던 행운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고난 재능에 더해 행운까지 겹쳐 드가는 예술가로서 드물게 생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이 아닌 100년도 넘는 과거의 이야기이다. 당대의 성공이 반드시 후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늘날까지 드가의 명성이 유지되는 것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는 예술가에겐 무엇이 있는가 라는 물음이다.

질문에 대해 내가 떠올린 대답은 시간을 이겨내는 예술가는 세월을 뛰어넘어 현대에 말을 걸 수 있는 소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나 다 빈치는 물리적으로 현대와 500년 가까이 떨어져 있는 이들이지만 큰 맥락에서 볼 때 우리의 시대 역시 그들이 열어젖힌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연장선 상에 있으므로 그들은 생각보다 현대인의 마음에 가까이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동시대에 살았지만, 바늘 끝에 천사 몇 명이 서 있을 수 있을까 같은 문제를 고민했던 신학자들은 후세와 접점이 사라지며 오늘의 우리와 단절되어 과거에 갇혀버렸다.

2. 드가가 시간의 시험을 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

드가를 무희의 화가라 하지만 그를 발레 그림을 그린 화가로만 규정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 공연장과 발레 연습실을 드나들던 1870년대에 그는 발레 그림 외에도 ‘압생트 한 잔(1876)’ ‘면화거래소(1873)’ ‘콩코르드 광장(1875)’ 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경마는 발레와 더불어 드가 그림의 또 다른 주요 소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세계에서 발레는 매우 큰 부분이었기에 오늘날 그는 무희의 화가라 불리고 있다.

2018년 드가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었다가 취소되어 관람을 희망했던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낳았던 적이 있었다. 보통 미술 전시회에는 해당 작가를 사랑하는 애호가나 미술 관련 학생, 종사자들이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짐작하겠지만 드가의 작품에는 독특한 팬덤이 형성되어 있는데 바로 발레애호가들이 그의 작품을 찾는다는 것이다. 객석 여기저기에 앉아 좋아하는 무용수에게 공연 중간중간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쳐대는 이들이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미술관을 찾는다는 건 언뜻 머리 속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으나 실제로 드가는 미술애호가가 아닌 집단을 전시회에 끌어들일 수 있는 보기 드문 대중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점은 드가 그림과 일반 관객을 이어주는 중요한 끈이 발레이며, 오늘날 당장 한국에서도 목격하는 바, 발레에 대한 애호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한 세기 이전의 화가에 대한 기억을 끝없이 오늘로 불러오는 스위치 역할을 하면서 드가가 망각 속에 가라앉지 않고 마치 우리와 한 시대를 사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발레를 향한 팬덤이 만들어져 있지 않은 세계라면 유독 발레 그림을 많이 남긴 드가를 100년도 넘은 이 시점에서 현재로 소환할 연결고리가 마땅치 않을 것이다. 드가는 미술사 책을 일부러 열어 보는 사람만 만날 수 있는 역사 속에서 잠자는 예술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3. 러시아 발레의 창조성 : 드가의 작품 세계에 새 생명력을 공급하다

드가가 1870년대부터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유럽의 변방 러시아에 뒤늦게 발레 열풍이 찾아왔다. 프랑스로부터 무용수, 안무가를 받아들인 러시아에서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 해적 등 새로운 작품들이 태어나 발레의 레퍼토리가 크게 확대된다. 20세기 초에는 니진스키같은 천재가 기존의 틀을 깨며 파격을 시도하였고, 공산 혁명 후 러시아를 떠나 온 발레예술가들이 서유럽에 이러한 러시아의 새로운 발레를 전하는데 이것을 발레 뤼스(Ballet russe)라고 한다. 19세기 초 라 실피드, 지젤 같은 낭만 발레 시대를 열었던 프랑스가 거꾸로 러시아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러시아로부터 새로운 조류가 유입되지 않은 프랑스 발레는 한때는 놀라웠으나 더 이상 새롭지 않은 레퍼토리를 반복재생하다가 역사의 화석이 되는 경로를 밟지 않았을까. 다행히 러시아로부터 새로운 자극을 받은 발레는 다시금 생명력을 얻어 서양 무용의 중심적 위치를 지금까지도 지켜오고 있다. 덕분에 드가의 발레 그림도 과거의 한 장면을 담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숨는 대신 2020년에 보아도 어딘가의 무용 학원 풍경을 보는 것 같은 현장감을 발산하며 전 세계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있다.

화가가 선택한 발레라는 소재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초월하여 생명을 유지해 온 것, 더불어 자신의 작품의 생명력으로 이어진 것, 그것이 드가의 또 다른 행운이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4. 유럽 문화의 헤게모니에 올라타고

지금까지 언급한 드가의 삶과 발레의 역사는 모두 유럽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다. 반면 오늘날 드가의 명성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드가가 거둔 성공의 원인을 재능과 행운 같은 개인적 요인에서만 찾을 수 없다. 만약 드가가 유럽인이 아니었고 유럽이 세계를 제패한 적이 없었다면, 유럽의 군대와 상인이 지나간 길을 따라 유라시아대륙 서쪽의 문화가 전세계로 흐른 적이 없다면, 지금 필자가 이런 글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예술 그 자체의 가치를 볼 줄 아는 눈 앞에서는 드가의 국적이나 인종이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문화의 전파와 확산에는 그런 것이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19세기 어느 시점에 이르러 유럽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으며 유럽과 세계 각지의 식민지를 잇는 항로를 따라 유럽의 문화도 흘렀을 것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이용한 20세기 미국 대중 문화의 전파만큼 빠르고 강력하진 않더라도 범선이 움직이는 속도만큼 더디게 그러나 그만큼 오래 그리고 깊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유럽의 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문화 전파로의 존재는 드가의 미술이 확산되기 위해 필요한 암묵적 전제였다. 그리고 서양 예술 속 발레의 위상이 현재형이듯, 유럽문화의 세계적 헤게모니도 (아직은) 현재형이다.

5. 유럽 헤게모니의 위기와 부활

드가 자신이 의식하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유럽 문화에 속한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개인적 재능과 노력, 행운 만큼 중요한 요소였다. 동시대 조선에 드가가 태어났다면 타고난 천재성으로 김홍도나 신윤복 만큼의 명성은 얻었을 지 모르나 그의 성취가 도달할 지점은 딱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오늘날 한류가 퍼져나가는 것도 대한민국의 경제적 힘이 문화를 뒷받침할 만큼 뻗어나갔기 때문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유럽의 패권은 확고해 보이는 순간 벌써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드가가 대표작 발레수업을 그리고 있었을 1871년에 그의 조국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했다. 지구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는데 식민지를 독차지한 영국과 프랑스에 도전하게 될 독일이 그때 성립한 것이다. 그리고 약 반 세기 후 유럽의 한 세대가 거의 사라졌다는 제1차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드가가 1917년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에 발발한 제2차세계대전은 유럽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세계 속에서 유럽의 우월함을 증명할 물적, 정신적 기반이 모두 날아갔다. 실제로 전후 유럽은 수백년간 지배하였던 식민지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렸다. 그런데 창조력이 소진되던 유럽 발레를 변방의 러시아가 구원하였듯, 이번에도 몰락의 위기에 있던 유럽을 구한 것은 서양 문명의 변방에 있던 미국과 소련이었다. 잿더미가 된 동, 서유럽에 시장을 열어주고 원조를 제공하자 유럽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유럽의 지위 회복과 동시에 유럽 문화의 헤게모니도 20세기 내내 유지되었다. 클래식 음악의 고상함, 발레의 우아함, 문학의 심오함은 의심받지 않았다. 정말이지 전쟁으로 무너진 채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지 못하는 유럽이었다면 누가 그 문화를 이전처럼 우러러 보았을까. 소수 연구자와 애호가의 탐미 대상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드가 뿐 아니라 수백년 축적된 유럽 문화 전체가 역사라는 배를 타고 아슬아슬한 항해 끝에 간신히 난파를 피해 지금 이 자리에 무사히 도달한 것이다.

6. 맺으며

이제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처음에 드가 이야기를 꺼낼 때에는 이렇게 긴 글이 될 줄 몰랐다. 생각을 정리해놓고 쓴 것이라기보다 쓰면서 생각이 점차로 정리되었다고 해야 할까 싶다. 중언부언한 글을 올려 놓고 민망한 마음도 든다.

여기까지 쓰며 느낀 것은 드가 뿐 아니라 모든 문화적 성과물들은 드러나지 않은 험난한 시간의 파도를 넘어 우리 앞에 당도하였다는 것이다. 액자 앞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만 작품이 내 앞에 놓이기까지의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림 한 점도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매미가 여름 한 철 노래 부르기 위해 땅 속에서 10년을 애벌레로 지내지 않나.

수많은 변수 중 하나가 달라졌어도 내 눈 앞의 문화적 풍경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달랐을 수 있다. 그것은 현재 내가 향유하는 문화의 소중한 가치를 다시 제대로 음미해야 하는 당위인 동시에, 뛰어난 예술성에도 불구 어쩌면 단지 시간의 주사위놀음에 희생되어 망각되었을 지 모르는 예술가와 그 작품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였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야 함을 뜻한다.

2018년 불발된 드가 전시회 이후 마음에 품어왔던 생각들을 풀어내니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 언제 다시 드가전 소식이 들려올 지 모르겠으나 그때가 온다면 발레관객으로서의 호기심은 물론 한 명의 미술관객으로서 진지한 관심을 갖고 그림을 마주할 생각이다. 그 때에는 드가의 그림에 2018년 한반도 미사일 위기를 건너뛰고 드디어 한국을 찾았다는 스토리 하나가 추가되어 있겠지.



마린스키 황실극장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
고전발레의 대작 ‘백조의 호수’
비스마르크(우)와 나폴레옹 3세(좌)
영화 1917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중심이 된 국제연합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