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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를 그린 화가, 드가 (1)

장화 신은 고양이 2020. 10. 29. 08:08



발레를 열심히 보러 다니던 시절, 발레무용수 인스타그램 계정을 다수 팔로우해 둔 후로 지금도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홈에 발레 사진들이 주르륵 뜨곤 한다. 전세계 발레단이 공연 홍보를 위해 올린 영상들도 무척 많고, 무용수 개인이 게시하는 사진, 전문 사진작가들의 사진도 많다. 올해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문화계도 타격을 받아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었지만 예년같으면 매 정기공연마다 일반 관객들이 찍은 커튼콜 사진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문득 150년 전 파리오페라발레극장에서 발레리나들을 그리던 드가가 우리 시대로 찾아와 붓 대신 카메라를 든다면 그는 이번에도 과거와 같은 성공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스치고 갔다. 직업사진가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카메라 달린 스마트폰 하나쯤 모두 갖고 다니는 이 시대. 미술사의 한 시대를 장식한 대가에게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이 예의가 아닐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러운 나의 의견은 ‘이번에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은 ‘성공은 재능과 더불어 한 인물이 놓여 있는 특별한 맥락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즉 드가의 명성은 19세기 말이라는 구체적 환경 속에서 태어난 특수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1. 19세기, 카메라의 발전과 좁아지는 회화의 영역

언제부터인가 한 사람이 거두는 성공이 노력과 재능은 물론 그가 선택하지 않았던 또는 선택할 수 없었던 외부 변수들 사이의 함수 관계라는 것을 사회분위기가 수용하고 있다. 사실 이는 매우 당연한 것이라서 새삼 강조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인데, 이 세상의 그 누구라도 절대적으로 혼자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주변과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나는 미술에는 문외한이라 에드가 드가의 예술적 재능에 대하여 논할 수는 없다. 대신 그가 살았던 19세기라는 시간과 당대의 프랑스라는 외생 변수를 살펴볼 것이다. 드가는 특출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알맞은 때에 적당한 곳에 있었던 행운을 누렸다고 본다.

에드가 드가(1834~1917)는 알려져 있듯 빛과 색채를 중시한 유파인 인상주의 화가로 1870년대부터 발레리나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많이 남겨 ‘무희의 화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드가 자신은 인상주의 화가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며 실제로 그는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을 모델로 습작하며 성장하였고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드가는 자신이 사실주의 화가로 여겨지길 바랬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카메라의 발명 때문에 르네상스 이래로 이어지던 사실적 회화의 설 자리가 점차 좁아지던 시기였다. 니세포르 니엡스가 아스팔트를 코팅한 금속판에 최초의 사진을 찍은 1827년 무렵만 해도 무려 8시간의 노출이 필요하였기에 도저히 실제로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불과 10여년 후인 1836년에는 프랑스의 다게르가 20분간의 노출로 은도금판에 상을 남길 수 있는 카메라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1840년대에는 다게르의 기술이 더욱 개량되어 1분 정도의 노출이면 촬영이 가능해져 비로소 실용화에 접어들었다. 드가가 태어난 지 몇 년 사이에 카메라는 이미 사람들 삶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드가의 젊은 시절 모습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그가 32세 되던 1865년에 찍은 초상 사진이 있기 때문이다.

드가가 발레리나를 화폭에 담기 시작한 1870년 이후에도 카메라는 발전을 거듭한다. 드가가 발레 수업(1871-74), 발레대기실(1872), 발레 스타(1878), 토슈즈를 묶는 무용수들(1883)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젤라틴 유제의 개발로 필름 제작이 가능해지고(1880년대), 1888년에는 미국의 이스트만이 필름이 담긴 코닥카메라를 세상에 내놓기에 이른다. 이때 코닥이 내건 슬로건은 “You push the button, we do the rest.”였다. 카메라가 대중화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2. 드가: 그림의 시대와 사진의 시대가 교대하기 전 눈부신 빛과 색감의 시절을 살아가다

그런데 19세기 카메라 기술이 장족의 발전을 이루는 동안 서양 미술이 고유의 영역을 카메라에 모두 내어주지 않고 인상주의의 꽃을 피워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의 짐작으로 이는 당시의 기술이 아직 천연색 촬영이 곤란하였다는 사정, 즉 흑백 촬영만이 가능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초의 컬러 사진이 1861년 영국의 제임스 맥스웰에 의해 촬영되었으나 실용화까지 갈 길이 아직 멀었다. 19세기의 카메라가 비싸고 다루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아직 색채를 정복하지 못한 미완의 기술이었다는 사실은 서양미술사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고 본다.

19세기 말 인상주의 미술은 구도와 형태를 묘사하는 영역을 카메라에 내어 준 후, 전통회화가 빛과 색채를 중심으로 회화의 존재 이유를 지키고자 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드가는 서양 회화가 빛과 색채의 묘사라는 마지막 영역을 급속히 발달하는 카메라 기술로부터 사수하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화가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드가는 1917년에 세상을 떠났다. 겨우 10년 후인 1928년, 코닥사가 컬러 필름을 출시하며 컬러 사진의 시대가 열렸다.

드가는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적당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리고 이는 그의 성공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너무 빨리 태어났다면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몽환적인 색감을 발산하는 대신 사실적 기교로 가득하지만 곧 새 조류 앞에서 진부해질 운명인 아카데미 화풍으로 그려졌을 것이고 결국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잊혔을 것이다. 너무 늦게 태어났다면 공연장과 무대 뒤, 연습실에서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작가들에게 밀려났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 살아갈 시대를 선택할 수 없지만 이는 성공적 커리어를 이룩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변수이고, 드가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

P.S. 필자는 예술에 관해 비전문가로서 본 글의 내용에 본의 아니게 오류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나, 엄밀함의 추구 못지않게 외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추론과 직관을 펼치는 데에 글쓰기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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