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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지젤’을 어떻게 볼까

장화 신은 고양이 2022. 11. 13. 22:55

1. 늦가을 밤, 국립발레단 ‘지젤’

공연을 보는 재미 중 하나는 막이 내린 후 돌아가는 길에 얼핏얼핏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를 스쳐가듯 듣는 것이다. 엄마와 딸이 나누는 이야기, 연인들끼리 오가는 인물평 같은 것들이다. 짧막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대화들 속에 사람들이 작품을 어떻게 감상했는지 잘 드러난다.
전형적인 패턴은 이런 것들이다. 1막과 2막 중 어느 편이 더 맘에 들었느냐? 등장인물 아무개는 대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느냐? 지난 토요일 밤, 국립발레단의 지젤이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린 딸은 1막이 재미있었다 하고, 어머니는 발레리나들이 하얀 옷을 입고 춤을 추던 2막이 좋더라는 식이다. 성인 관객들은 아이어머니처럼 발레를 춤으로서 감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어린이들은 인물과 스토리가 선명한 부분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아 발레를 이야기로 즐기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지젤도 그렇지만 발레 특히 무용수의 몸과 동작이 주가 되는 현대발레 이전의 작품들은 춤이면서 한 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용과 서사가 얽힌 2시간의 공연이 지나가는 동안 누군가는 춤에 누군가는 이야기의 흐름에 더 몰입하기 마련이다.
엄마와 딸이 지나간 후 바로 다음에 들려온 친구들 사이의 대화가 그러했다. 지젤 걔 너무 남자한테 구질구질 매달리는 거 아냐? 짝사랑한 힐라리온은 대체 뭘 잘못한 거지?

그 답은 나도 모른다. 그들도 알 수 없다. 결말없는 수다만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대화란 것이 꼭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건 아니므로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나쁠 것 없다. 아무튼 지젤 등장인물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놓고 오가는 이런저런 말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어 흥미로웠다.

2. 10년 전에 처음 본 ‘지젤’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2012년에 국립발레단의 지젤을 보려고 예술의전당을 처음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10년 전이다. 그리운 시절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곳에서 지젤을 적어도 열 번은 넘게 봤지 싶다. 나는 예당 오페라극장 객석에 앉을 때마다 처음 그 장소를 밟았던 10년 전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누군가는 3년 전, 누군가는 20년 전으로 또 누군가는 30년 전 자신의 과거를 향해 돌아갈 것이다. 지젤을 아는 모든 이들에겐 이 작품을 만난 첫 날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 날에야 라인 강변 마을 처녀 지젤, 한 마을 총각 힐라리온 그리고 신분을 감추고 지젤 곁에 다가온 알브레히트 사이의 비극적인 스토리가 갑자기 그의 삶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사실은 흥부전, 콩쥐팥쥐, 춘향전 같은 전래설화를 언제인지 알지 못하는 새 자연스럽게 의식의 일부로 흡수하는 사실과 반대이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한글교육용 동화책, 미디어로 접하는 수많은 전설들을 통해 한국에서 태어난 한 명의 아이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흘러간 기나긴 과거와 이어진다. 그러므로 1990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어느 아이는 당연히 21세기 한국인이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는 조선시대 사람이고 심지어 상고시대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가 춘향전을 드라마로 볼 때, 자신이 그 시대를 살아본 적 없어도 춘향과 몽룡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느끼게 된다. 반면 외국인은 춘향전을 단순히 이국적인 배경에서 펼쳐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여길 지도 모른다. 외국인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지젤을 감상하는 한국인에게는 반대로 작용할 수 있다. 애인에게 배신당해 죽은 처녀귀신 윌리들의 설화는 라인 강변을 따라 전해진다는 유럽의 오랜 전설로 훗날 발레 지젤의 소재가 되었던 바, 이 이야기는 유럽인 특히 프랑스, 독일인들에게는 무의식 속에 새겨진 코드일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이 설화를 발레로 재창조한 <지젤>이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것이 1841년이다. 그런데 발레 지젤에 관하여 나의 기억은 기껏 10년 전인 2012년에서 멈추게 되므로 유럽인의 마음 속에 요정이 살던 고대는 커녕 이 발레가 처음 만들어진 18세기 중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한다.
10년 동안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접하며 음악과 안무는 서서히 익숙해져간 반면, 뭔가 빈틈이 있어보이는 스토리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지젤은 자신을 기만한 알브레히트에게 왜 그토록 헌신적이었나, 자신을 짝사랑했을 뿐인 마을 총각 힐라리온이 귀신들 손에 죽도록 내버려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여성 관객들은 남자에게 좌우되는 지젤의 태도가 주체적이지 않다며 못마땅해하기도 한다. 발레의 스토리가 원래 좀 엉성하고 비정합적인 측면이 있다 여기고 그냥 음악과 무용수에 집중하는 관객들도 많다. 그런데 나는 유럽인의 역사적 집단무의식을 한국인이 함께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를 안고 발레 지젤을 대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고 지젤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들여다보기 위해 잠시 이야기 밖으로 나가 외부의 시선으로 이 작품을 관찰해 보려 한다

지젤과 알브레히트


3. 19세기 프랑스인의 눈으로 본 ‘지젤’은

지금부터는 나의 상상이다.
1841년 6월 28일, 파리오페라극장에서 관객들은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아주 잘 알고 있는 옛날이야기를 각색한 발레를 보았다.
라인 강변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독일 귀족인 알브레히트, 독일 총각 힐라리온이 마을 처녀 한 명을 두고 다툰다. 처녀도 게르만족일 테니 기젤라 라고 불려야 할 텐데 뜻밖에 그녀의 이름은 프랑스식으로 지젤. 파리 시민들은 프랑스식 이름이 붙은 이 독일 처녀가 옆집 아가씨인 듯 친근함을 느끼며 자기 자신인 것처럼 감정이입한다.
극장 안에는 왕족, 귀족도 있고 부유한 부르주아도 있지만 일반 시민들이 대다수. 일찌감치 대혁명이 전국을 뒤덮었다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 전 일,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루이 18세, 샤를 10세, 루이 필리프로 왕정이 이어지는 중으로 대중들 사이엔 좌절감과 무기력이 팽배하다.
무대 위의 춤은 관객을 매료시킨다. 농촌 젊은이들이 등장하는데도 그들은 꼭 귀족처럼 우아하게 춤춘다. 루이 14세 시절 확립된 온갖 테크닉을 평민처럼 차려입은 발레리나들이 보여준다. 그래 우리도 귀족들과 다를 것 없어.
지젤에게 사랑을 강요하는 힐라리온이 파리 시민 눈에는 과거를 강요하는 보수주의자로 보인다. 반면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난 알브레히트는 평민인 자신들을 닮은 지젤을 신분 상승 시켜 줄 미래의 약속으로 보인다. 2막에서 귀신들이 떼로 나타나 힐라리온을 잡아가자 시민들은 샤를 10세를 끌어내렸던 1830년의 7월 혁명을 떠올린다. 새벽을 알리는 종이 울리며 귀신들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아침에 지젤을 추억하는 알브레히트를 보며 관객들은 현실에서 좌절된 자신들의 꿈이 생각나 눈물 짓는다. (7년 뒤,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립은 영국으로 망명함)

지젤을 짝사랑하는 힐라리온


4. 같은 것을 놓고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지젤

19세기 중엽의 파리 관객들은 그들이 숨쉬던 시대의 공기 때문에, 발레 ‘지젤’을 오늘날과 상이한 자세로 대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의견이다. 초연 당시의 청중들은 힐라리온을 격하게 거부하고 알브레히트에게 비이성적으로 집착하는 지젤의 모습에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지젤은 자기 자신인데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힐라리온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래된 구체제를 수용하는 것이라서 이는 곧 신분하락이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정체 모를 외부인인 알브레히트는 알 수 없기에 불안한 미래를 상징하며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표면에 드러난 것은 실패한 사랑에 집착하는 소녀의 광기이지만, 1841년의 관객들은 미쳐버린 지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혁명이 실패한 후 우울해진 공기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우리들이 보기엔 어딘가 지나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발레 지젤의 줄거리를 19세기의 프랑스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놓고 당시 프랑스인의 눈으로 해석하면 앞뒤가 딱 맞는 이야기가 된다.

발레의 안무는 무용수들의 몸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거의 정확하게 옮겨지고, 음악은 악보로 기록되기에 복제의 정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22년 11월 12일 서울에서 본 지젤은 200여년 전 파리에서 초연된 지젤과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같을 것이다. 다만 가져오지 못한 것은 19세기 파리의 격정, 우울이 배어 있는 공기일 뿐인데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같은 지젤을 앞에 두고 전혀 다른 지젤을 각자의 마음 속에 만들어내고 있다.

국립발레단 정기공연 지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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