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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작을 앞서버린 파생창작물의 인지도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이 원작보다 더 인기를 얻는 일은 상당히 많고 결국 원작의 존재감을 대체해버리기도 한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이 유명하지만 원작은 이제 문학전공자만 읽는다. 독서가 아무래도 개인적인 행위라면 공연은 집단적인 활동으로 파급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책의 인기에 올라타 공연물이 제작된 후, 공연물의 인기가 책의 인기를 뛰어넘으면서 원전은 밀려나고 원작의 파생물이 더 강한 생명을 획득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문화현상이다.

2. 발레 호두까기인형과 E.T.A 호프만

지난 크리스마스에 국립발레단 송년발레 호두까기인형을 보러 외출한 날, 먼저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샀다.  크리스마스 마케팅으로 이 즈음에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책들 중에 호두까기인형도 있었다. 발레로 만들어지기 훨씬 오래 전에 독일 작가 호프만이 쓴 동화라는 것은 공연 프로그램북에도 의례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발레 호두까기인형을 본 사람들 중에 호프만의 동화까지 읽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 짐작한다. 호프만이 동화를 지은 1816년은 즐길거리가 부족하던 시대로 독서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겠으나 책이 다른 매체에 밀려난 지는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더구나 성인입장에서 일부러 시간을 들여 읽을 거리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며, 부모로서 아이에게 읽기를 권해본들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3. 동화가 발레가 되기 위해: 생략과 변형, 메시지의 소실

25일 오후 마지막 공연을 보고 돌아와 천천히 동화를 읽어보며 발레로 만들어진 호두까기인형과 원작 동화를 비교하며 나름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호프만의 원작 호두까기인형은 생각보다 분량이 길다. 어린이 그림책 류의 부담없는 읽을거리라고 생각했다면 다소 놀랄 수 있다. 삽화를 포함하여 약 140페이지 정도로 19세기의 어린이라면 몰라도 2023년의 아이에게는 꽤 길게 느껴질 것이다. 분량이 많다는 것은 곧 이야기가 길고 복잡해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스토리를 대사 위주인 연극이 아니라 음악과 춤으로 구성되는 발레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화와 생략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마리의 꿈 속에서 일어난 생쥐와의 전쟁, 왕자와의 만남 그리고 사탕나라 여행이야기의 묘사가 발레의 줄거리인데 원 스토리는 비슷하면서도 훨씬 미묘하고 진지하다.
동화에 따르면 마리는 자신이 깊은밤에 실제로 겪은 신기한 일들 그러니까 생쥐, 왕자, 사탕나라 이야기들을 부모와 오빠에게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고 도리어 거짓말쟁이라고 혼이 나기까지 한다. 결국 마리는 아무도 믿지 않는 꿈같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더이상 입밖에 내지 않는데 그러던 어느날 호두까기왕자가 정말 사람으로 나타나 마리에게 청혼하며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그저 신기한 이야기로 읽고 책을 덮어도 그만이지만 진지한 고민도 묻어있다. 온갖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 밤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에게 드러나는 상상의 세계라면 밝은 낮은 어른들이 살아가는 논리와 이성의 세계이다. 마리는 냉정하고 단단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어 외롭다. 마리와 모든 모험을 함께 겪은 호두까기인형이 사람이 되어 찾아왔을 때에 비로소 마리는 더이상 고독하지 않다.

언어를 소거해버린 발레는 원작의 미묘한 뉘앙스를 모두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게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인형은 가벼운 판타지로 채워진 연말 축제 공연이 되어버릴 찰나에 마지막 반전을 숨기고 있다.

4. 그래도 발레가 예술인 것은

마리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고 화려한 축하 속에서 행복에 젖는 가운데 무대는 서서히 어두워져 결국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때, 오케스트라가 침묵하고 부드러운 목관악기 소리와 함께 무대 오른쪽에서 잠옷을 입은 소녀가 기지개를 켜며 걸어나온다. 어둠 속에 앉은 관객은 이를 보며 지금까지 본 모든 장면이 소녀의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녀가 무대 중앙으로 몸을 돌려세울 때 갑자기 조명이 환하게 밝아지며 방금 전까지 왕자와 공주, 인형들, 요정들이 춤추던 그곳에 아빠와 엄마, 드로셀마이어 대부가 서 있고 오케스트라에서 금관악기의 밝은 소리가 크게 울리며 마리는 두 팔을 벌리고 어른들에게 달려가 안긴다.

발레의 결말은 우리를 위로해주던 환상을 벗어나 다시 모순 가득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괴로운 그 순간, 힘찬 소리와 눈부신 빛으로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준다. 대단원의 몇 초를 아름답게 그려내려는 안무가와 음악가의 예술적 고민이 호두까기인형을 단순한 즐길거리 이상으로 승화시켰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호두까기인형의 명장면은 눈송이왈츠나 2막의 군무보다 어린 마리가 팔을 벌린 부모에게 달려가는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미건조한 현실 속에서 문학과 판타지의 세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드러난 원작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지만 한 해를 닫고 새해를 맞는 시점에서는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5. 원작의 재미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자면 현실로 당당히 걸어들어가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마음 속에 간직한 내밀한 환상의 세계 역시 있어야 한다. 발레에 가려져 잊혀진 감이 있는 동화 호두까기인형도 시간을 내 읽어보면 공연장의 들뜬 분위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잔잔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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