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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첫 줄을 쓰고 있는 3월 8일 밤 11시 현재, 4일간 예정으로 한국에 찾아온 파리오페라발레의 ‘지젤’ 내한 공연 첫 날이 깊은 여운 속에 끝났을 것이다. 서울보다 앞서 대전에서 공연을 본 분들의 말에 따르면 무용수의 기량이나 무대예술의 수준 등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다만 고가의 티켓이 부담스러운 탓인지 발레단의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객석이 완판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 이런 것을 보아도 예술에 국민이 접근하기 위해 국립예술단체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1. 발레의 원본을 찾아서

       개인적으로 만만치 않았던 티켓값을 지불하고 이번 공연을 보기로 한 것은 발레의 본산지인 프랑스의 파리오페라발레가 ‘지젤’의 원본을 더 나아가 ‘발레’의 원본을 보여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말은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특정 발레단이 원본이라면 나머지는 불완전한 모사라는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칫 수많은 예술인들에게 큰 실례를 범하는 언행일 수 있고,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간 수없이 뛰어난 공연을 선보인 국내 발레단에게 보낸 감사와 응원을 자기도 모르게 부정하는 어색한 행동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파리오페라발레에 차별적 위계를 부여하기보다는 이 공연을 통해 발레의 역사상 특수한 시대적 위치를 지닌 그들이 과연 타 발레단과 구별될 수 있을 만큼 명성에 걸맞는 전통의 계승자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바람이다. 다만 그런 의도에 걸맞는 심미안이 내게 있는지가 문제라면 문제라 하겠다.


2. 고전적 이상을 담은 발레 그리고 낭만적 꿈을 그린 지젤

     그림, 노래 같은 모든 예술 형식이 그렇듯 춤 또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 춤의 한 갈래인 발레가 언제부터 존재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예술사에는 발레의 기원에 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의 현상으로서 발레의 탄생 순간은 최초의 발레를 추었던 그 사람조차 그 시점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이 춘 것이 발레라고 생각한 적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 기술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발레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게 된 이후에야 사후적으로 시도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발레라는 것이, 두 발을 골반으로부터 바깥으로 향하게 벌리고 다리를 좌우 앞뒤로만 움직일 수 있게 엄격히 제한하며, 머리는 곧게 세우고 시선은 멀리 두면서 팔은 몸통과 수평이 되게 옆으로 뻗되 어깨는 아래로 살짝 떨어뜨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 발레라면 분명하게 기원을 말할 수 있다. 후세의 모든 무용수가 따르게 되는 발레의 기본적인 자세와 스텝이 만들어진 것은 프랑스의 루이 14세 치세에서였다.

      루이 14세의 치세에 다듬어져 재탄생한 발레는 왕을 정점으로 인간의 위계를 나누기 위한 까다로운 예법을 무용의 규칙에 담은 것으로 위에서 언급한 발레의 기본 자세들은 신과 천사들에 가까운 몸가짐을 모방함으로써 평민과 달라보이려는, 심지어 불순한 혈통의 가짜 귀족과 구별짓기 위한 당시 귀족들의 강박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들 위에 서려는 국왕의 의도를 실현하는 정치적 도구로 발레가 이용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왕이 정한 발레의 규칙에서는 어떠한 자세나 동작도 우연에 맡겨지지 않고 미리 정해진 법칙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엄정함은 예술보다는 일견 수학이나 과학의 정밀성을 닮았다. 오랫동안 궁중 행사에서 선보이던 멋들어진 스텝은 수학공식같은 규칙을 통해 정제되면서 한단계 높은 단계의 예술로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계급사회를 공고히 하기 위한 어용예술로 탄생한 발레가 인간 사이의 차별을 반대하는 현대에도 여전히 고상한 예술로 받아들여지고 향유되는 것은 일견 역설적이고 깊이 고찰할 가치가 있는 현상이다. 또한 동시대의 뉴튼 물리학이 수학을 통해 물질 세계의 질서를 묘사하듯이 루이 14세의 발레 역시 치밀하게 계산된 안무로 인간 세계의 완벽한 질서(물론 국왕 자신이 정점에 존재하는)를 그려내었는데, 고전적이고 이성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수단이던 발레가 그 정반대에 있는 낭만의 세계를 무대 위에 묘사하는 수단이 된 것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번 토요일까지 서울에서 보게 되는 ‘지젤’은 절대주의 시대에 태어난 프랑스 발레의 전통을 잇는 파리오페라발레가 고전주의 시대의 테크닉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정신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볼 기회가 될 것이다.


3.  낭만발레 ‘지젤’ 속 매드씬

        잠시 낭만주의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보통,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시대의 지나친 이성의 강조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사조라고 이해되고 있다. 이성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지적 능력에 충분한 정보만 결합하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뉴튼 역학의 인상적인 성과는 이성의 힘으로 자연의 법칙을 도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도 수학공식처럼 적용되어 가장 올바른 사회의 구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듯 이성에 대한 믿음이 상응하는 훌륭한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당대의 사람들조차 이성의 힘에 대한 맹신에서 어떤 답답함과 공포를 느꼈던 것 같고 그 결과 인간이 결코 지성만으로 세계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는, 이성으로 미처 포착할 수 없고 합리성이 보류되는 삶의 공간이 있다는 생각에 매료된 것 같다.

      그런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태도가 낭만주의의 일부를 구성한다면, 누구인지 모르는 타인을 향해 스스로도 왜 인지 모른채 사랑의 감정을 품는 행위는 낭만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지젤 라바야데르 등 낭만발레의 소재로 빈번히 사용된 것 아닐까 한다.

      지젤의 사랑은 시작도 결말도 합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대로 사랑의 감정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객관적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길이라도 담담하게 가겠다는 용기가 낭만이다. 실패한 사랑을 뒤로 하고 죽음이라는 파국으로 향하는 지젤 1막의 마지막 매드씬(Mad Scene)은 그렇게 낭만발레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성이라는 불빛이 비춰주지 않는 곳에도 길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과 객관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그 믿음을 따르겠다는 의지 앞에서 비합리를 향한 구구절절한 비판은 힘을 잃는다. 지젤의 사랑에 대한 현대적 입장에 입각한 비판은 낭만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 것 아닐까 싶다.


4. 1막의 격정과 대조적인 차가운 2막- 유럽 문화의 정수는 어디에 있는가

       발레 지젤은 1막의 비극적인 매드씬 못지 않게 2막의 군무가 유명하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줄거리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사실 1막과 2막의 분위기는 너무 대조적이라 완전히 다른 2개의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 수 있다. 감정을 뒤흔들 정도로 충격적이기까지 한 1막의 마무리를 뒤로 하고 이어지는 2막의 군무는 수십명의 코르드발레가 무대 위에서 정확하게 기하학적 도형을 그려낸다. 지젤의 애절한 스토리를 잊고 안무만을 본다면 그것은 고대 그리스 정신의 고전적 유산이자 이를 물려받아 인간의 신체와 움직임에 신성을 불어넣으려던 루이 14세 시대의 흔적같다. 발레 지젤을 마무리하는 장면은 붉은 색 정열이 아닌 푸른 색의 차분함이다. 즉 지젤은 낭만적 발랄함과 뜨거움으로 막을 열고, 그 열기를 질서와 절도로 가라앉히며 종결된다.

        이를 보면 낭만주의란 서양 문명에서 막간의 휴식이며 결국 그 뿌리는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기하학의 정신에서 비롯한 그리스 문명이 유럽 문명의 뿌리이고 그 유럽 문명의 현대적 요약이 절대주의 시대 이후부터의 프랑스 문화라면 이번에 방한 중인 파리오페라발레에게서 그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의 춤 속에서 발레 지젤 속에 존재하는 낭만주의와 기하학적 합리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이 어떻게 드러날지 궁금하다. 그들 유럽인들 정신에 뿌리박힌 이성 우위의 문화에 대한 극단적 반항이었을 지젤 처녀의 광란의 장면을 그 문화 속에서 나고 자란 프랑스 무용수들은 어떻게 표현할지, 그리고 낭만적 심성마저 자와 컴퍼스처럼 정확한 발레라는 도구로 그려낼 수밖에 없는 그들이 보여주는 2막의 군무는 어떠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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