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설

베아트리체 첸치

장화 신은 고양이 2018. 1. 14. 23:49




베아트리체 첸치 Beatrice Cenci



스탕달 증후군 : 아름다운 그림 같은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어지러움, 환각 따위를 경험하는 현상.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1817 이탈리아 피렌체를 방문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귀도 레니가 그린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보고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 채호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스며드는 셋방에서 선잠을 잔 탓에 피로가 풀리지 못한 몸이 이불에서 쏙 빠져나올 때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이미 건강상 이유로 월요일에 결근 했으므로 이 날은 웬만하면 출근해야 했다. 그리고 어쨌든 오늘은 금요일이고 퇴근하면 예술의전당에서 연극을 볼 예정이다.


선생은 종일 머릿 속으로는 오늘 보기로 연극만을 생각하면서 1교시부터 마지막 수업인 7교시까지 대충대충 건성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어차피 얘네들 학원에서 배워오는데

시계를 보니 수업종료 5분전이다. 단원 마지막 단락을 빠르게 읽어내려간다.

스탕달 증후군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감상할 호흡곤란, 어지러움 같은 신체이상증상이 수반되는 현상으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감상한 이런 증상을 겪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선생이 웅얼웅얼거리며 수업을 급히 마무리해갈 반쯤 자고 있던 아이들도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와 가방에 책을 집어넣으며 귀가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

지겨운 하루를 끝낸 선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무실에 들러 짐을 챙기고 동료들에게 인사하고서 교사 밖으로 뛰어나오는데 아침에 이어 두번째 현기증이 찾아왔다.

, 이게 대체 뭐지.’

이미 다섯 시가 지났으니 병원에 가기에도 늦었네

아마 갑자기 찬바람을 탓이라고, 지금 서둘러야 늦지 않게 연극을 있다고 애써 불안감을 지웠다.


따뜻한 전철 안에서 몸은 다시 편안해졌고 막연한 걱정은 금새 잊혀졌다. 걱정이 사라진 자리를 이내 다른 잡생각이 채웠다.

스탕달 증후군?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얼마나 대단한 그림이길래 그러지. 아무리 그래도 겨우 그림 앞에서 무릎이 꺽이다니 과민반응 아냐?’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베아트리체 첸치는 어린티를 벗지 못한 젊은 아가씨로 하얀 두건을 쓰고 옷을 입어 옅은 갈색의 낯빛이 도드라졌고 검은 눈망울엔 체념이 서려 있었다. 사형을 당하기 하루 전에 유명한 초상 화가인 귀도 레니가 감옥에 찾아가 그렸다고 한다

죽음을 하루 앞둔 여인의 눈빛이라

작은 스마트폰 스크린에 처연한 눈빛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렇다고 호흡곤란이 정도는 아닌데 역시 스탕달은 신경과민이었던 걸까




전철은 어느 남부터미널역에 도착했고 그는 지름길을 택해 극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날 무대에 오른 작품은 프랑스혁명 공포정치 당시를 그린샬럿 코르데의 변명이었다.

코르데 역을 맡은 배우가 욕조에 들어앉은 마라에게 외쳤다.

무고한 프랑스인 명을 살리기 위해 당신 명을 죽이러 왔어요!”

 풍부한 성량에 숭고한 감정을 가득 담아 코르데가 외쳤다.

가증스러운 혁명의 ! 너같은...”

마라는 하려던 말을 다하기 전에 가슴에 비수를 받았다.

아악!”

단말마의 비명에 객석이 얼어붙었다.

순간 선생도 명치에 심한 압박을 느끼며 가느다란 신음을 토했다.

....”

역시 명연기군

마지막 장면은 마라를 죽인 죄로 참수형이 언도된 샬럿 코르데가 단두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었다. 하얀 두건을 쓰고 양손이 포승줄에 묶인 코르데가 객석에 등을 보이며 계단을 오르다가 세상에 미련이 남았는지 마지막 순간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관객을  바라볼 무대의 불이 꺼졌고,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한 진공같은 침묵이 잠시 흐른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커튼콜까지 끝난 장내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코르데가 고개를 돌려 뒤를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을 받은 교사는 멍한 느낌에 계속 앉아있다가 마지막에 빠져나갔다.




1 출연자 입구에는 언제나처럼 꽃다발을 배우의 지인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한참 만에야 분장을 지운 날의 출연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라 역을 연기한 남자는 마르고 약한 인상으로 짙은 분장을 지운 실제 얼굴에는 아까 전같은 카리스마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배우들도 보통 사람들보다 다른 점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배우의 강렬한 인상은 눈부신 조명과 짙은 분장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과 객석 사이의 거리에서 태어나는 것이었다

다소간 실망한 그가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이미 사람이 모두 떠난 로비에 여배우 명이 마지막으로 나오고 있었다. 분장을 지운 얼굴이지만 알아볼 있었다. 코르데, 살럿 코르데잖아!

안녕하세요, 훌륭한 연기였어요!”

그가 침착하고 따뜻한 태도로 말을 건네자 배우도 친절하게 말을 받았다.

, , 고마워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그는 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여자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흑단같이 검은 머리, 하얀 분장을 지운 옅은 갈색의 작은 얼굴, 크고 까만 ,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 검은 스타킹, 검은 구두. ‘샬럿 코르데가 마지막으로 입은 옷은 두건부터 치마까지 하얀 색이었는데 지금 앞에 있는 배우는 기괴할 정도의 검은 옷차림이야. 하지만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예술의 전당 출구를 나서기 직전에 그녀가 몸을 돌려 소심한 신사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길 따라오라는 듯한 이상한 미소를 띠고.

미소, 뭐지

그래 베아트리체 첸치!’

초상화 베아트리체는 슬픈 무표정이었다. 그러나 상상의 힘을 빌려 베아트리체를 미소짓게 방금 여배우의 웃던 얼굴과 오버랩되었다.


교사는 공연의 강렬한 인상, 코르데를 연기한 배우의 깊은 눈빛을 마음에 담고서 집에 돌아왔다. 11 45, 잠자리에 누웠지만 강렬한 흥분에 잠을 이룰 없었다. 가슴은 고통스러울만큼 두근거리고 호흡은 시시각각 불규칙해졌다. 물을 마셔보려고 일어섰지만 무릎이 후들거려 두걸음도 못가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잠을 자면 괜찮아질 거야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생각으로 가슴을 진정시키자

일부러 그러려던 것도 아닌데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가 머릿 속에 그려지고, 그녀가 미소 짓자 얼굴이 순식간에 코르데로 바뀌었다. 검은 두건, 검은 드레스를 입은 코르데가 앞서 걷더니 고개만 왼쪽으로 살짝 돌려 선생을 바라보며 검은 장갑을 검지 손가락을 매혹적으로 깔짝거리며 어서 따라오라고 채근했다.

교사는 달뜬 흥분에 가슴이 방망이질쳤다. 맥박이 오르고 숨이 가빠지며 고통을 동반한 쾌감이 느껴졌다.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아니 코르데의 얼굴이 아니 여배우가 아니 다시 슬픈 표정의 베아트리체가 눈앞에 그려지다가 그림 위에 물을 뿌린 모든 희미해지더니 갑자기 머릿 속에서 빛나던 전구가 퍽 소리를 내며 꺼져버렸다.


월요일 저녁, 무단 결근에 연락도 되지 않는 채호를 동료 교사들이 찾아 왔을 , 그는 숨져 있었다. 사인은 급성 심정지. 천장에 무언가가 있는 눈을 뜨고 있었고, 얼굴엔 행복해 보이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0) 2018.01.23
후광  (0) 2018.01.01
1퍼센트 혹은 백분의 일  (0) 2016.08.05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