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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후광

장화 신은 고양이 2018. 1. 1. 13:55



후광(後光)



거실 테이블을 ㄱ자로 둘러싼 소파 한쪽에 초로의 부부가 가까이 붙어 앉아 있고 조금 거리를 띄운 자리에는 젊은 아가씨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
세 사람 모두 표정이 어두운데 자세히 보면 부부가 아가씨의 눈치를 보고 있다. 드디어 나이든 부인이 어렵게 말을 꺼낸다.
“아가, 이제 그만하면 됐다. 그 사람과는 인연이 아니었던 게지. 대체 밥도 안 먹고 물까지 안 마시고 엄마 아빠 앞에서 뭔 짓이니!”
머리가 반쯤 하얗게 센 남자가 아내의 말을 조심스레 받는다.
“너 그날 후로 너무 오래 집에만 있었어. 그래서 더 우울한 거야. 오후에 날 풀리면 애비랑 같이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
“...” 딸은 말이 없지만 그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리고 이미 떠난 사람은 다 그럴 만해서 그렇게 된 거지 누구 잘못도 아니야. 결혼할 사람은 때가 되면 다 알아보게 된다.”
아이의 안색을 살피며 천천히 말을 마친 반백의 남자는 소파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으로 간다.


사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딸에게 한 말은 그저 실연한 딸을 위로하려고 의례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지만 젊은 시절 지금의 아내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매우 특별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늦은 단풍이 남아 있던 어느날 마을 밖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그 공원에는 산자락 아래에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었다. 시간은 오후 5시쯤이라 분수대 쪽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을 때 그쪽에서 흰색 외투를 입은 어떤 여자가 자기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등뒤로 환한 아우라가 빛나는 듯하여 남자는 뭔가에 홀린 듯 여자를 계속 주시하게 되었다. 역광 때문에 얼굴이 내내 보이지 않다가 서로의 거리가 겨우 두 세 걸음까지 좁혀졌을 때 비로소 처음 얼굴을 알아보았는데 그 순간 내쉬던 숨이 도로 몸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여자에게 들릴까봐 눈이 마주치기 전에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게 오늘로부터 21년전 일이고 그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지금 스무살인 딸이 태어났다.
천성이 별로 말이 없는 남자는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조차 꺼내지 않은 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있었다. 기나긴 결혼생활 중에 아내에게 실망한 적도 많았고 그럴 때마다 ‘만약 다른사람이었다면’ 이라는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의 아내에게 눈부신 빛이 함께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결혼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운명이었다는 믿음으로 이날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그 운명의 열매인 딸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남자는 딸과의 외출을 준비하기 위해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30분이다.


부녀는 손을 잡고 천천히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아이들 놀이터, 딸이 오래 전에 졸업한 중학교, 가로수길 등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 본다. 특별히 말은 많이 하지 않았다. 남자는 딸을 사랑하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를 잘 몰랐다.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엄마와 있을 때와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계속 길이 이어지는 대로 걸어갈 뿐이었다.
어느 덧 짧은 겨울해가 기울었다. 시간은 오후 4시 45분. 두 사람은 산자락 아래 마을 공원까지 와 있었다. 머리 희끗한 남자는 담배를 피우려고 잠시 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담배 한개비가 필터까지 타들어오자 그는 이제 집에 돌아가자고 말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가! 춥다, 그만 가자!”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딸이 분수대 쪽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아버지는 멀찍이서 딸이 다가오는 걸 보고 있다. 아이는 엄마를 참 많이도 닮았다. 키, 체격은 물론 얼굴도. 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치 홀로그램 착시현상처럼 아내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분수대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저 걸음걸이까지 20년전의 제 엄마를 닮았단 말이지.

그런데 문득 남자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스쳤다. 오후의 해는 분수대 뒤가 아니라 그 반대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분수대는 공원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그가 지난 20년간 기억하고 있던 서산에 지는 해를 등에 지고 분수대 쪽에서 걸어오던 아내의 아우라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20년 사이에 분수대 위치가 바뀌었나?


남자는 순간 답을 깨달았다.
아빠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여식의 모습이 모든 걸 말해줬다.
‘아내의 아우라는 실제로는 보인 적이 없었던 거야.
그날의 지는 해는 다른 쪽으로 넘어갔었지. 바로 오늘 보고 있듯이.
그런데 왜 아내의 등뒤로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고 믿게 되었을까. 그것은 내 인생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 되려면 아내와의 첫 만남 역시 우연이 아닌 운명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지. 아내의 아우라는 자신의 결혼이 운명이기를 바랐던 더 나아가 아내가 여신이기를 갈망한 내 욕심이 지어낸 연출효과였던 건가...’
갑자기 진실을 깨달은 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무릎이 꺽였다. 그 모습을 본 딸이 놀라 황급히 달려왔다.
“아빠! 왜 그래요?!”
“난 괜찮다, 얼른 집에 가자.”
아버지가 비척거리는 모습을 본 딸은 스스로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감옥처럼 견고하던 자신의 수심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 왼쪽에서 천천히 걸음을 떼며 언제든 부친을 부축할 수 있도록 아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겨울 찬바람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와 딸을 아내가 맞았다.
“그래 둘이 사이좋게 산책 좀 했수?”
“응. 그리고 넌 들어가 쉬렴.”
남자는 혼자 방에 들어가버렸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간직해 온 환상이 착각이었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쨌든 수십년간 부부생활을 해왔고 자식도 하나 낳아 이만큼 길렀다. 그러는 동안 아내의 노고와 은혜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왠지 서운했다. 6살 아이가 크리스마스에 받은 인형이 산타할아버지가 준 거라고 믿고 있다가 사실은 아버지가 준 것이었음을 어느날 갑자기 깨달을 때의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7시, 아내가 집밖으로 나간다. 남자도 뒤따라 간다.
아내는 고양이를 사랑했다. 겨울이 되면 동네 고양이 굶어죽지 말라고 사료를 챙겨 마을 고양이 은신처마다 뿌려 준다. 처음엔 사람도 아니고 짐승에게 헛돈 쓴다고 부부간에 다투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밤늦게 다니는 아내가 걱정되어 멀찍이 뒤따라다닐 정도가 된 지 오래다.
남자는 아내의 뒷모습을 본다. 오늘 늦은 오후의 갑작스런 깨달음이 떠올라 심란하다. 아내가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면 결국 그냥 아무와 만났어도 그럭저럭 살았겠구나. 내가 지금 고양이에게 밥 준다고 밤에 쏘다니는 저 여자 뒤를 따라다니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로구나.


고양이 은신처는 여러 군데인데 아내는 그런 장소들을 잘 알았다. 부서진 담장 사이, 폐건자재 쌓아둔 곳, 버려진 골목길 등엔 어김없이 고양이가 숨어 있다가 해가 숨으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은 분수대였다. 거기에도 고양이가 많이 살았다. 남자는 분수대를 보자 괜시리 마음이 복잡하여 아내를 앞질러 아내가 고양이 밥을 주는 동안 천천히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때는 12월 초, 딸과 귀가할 무렵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빛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산자락을 따라 흐르던 노을 띠도 짙은 회색으로 변해가는 하늘 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대장을 따라 어딘가로 날아가던 새떼가 사라지자 회색 하늘은 아예 조금씩 검은 빛을 띄기 시작했다.


“이제 집에 가지!” 아내를 부른다.
평소 오던 고양이가 다 오지 않았는지 남은 사료를 비닐 봉투에 담은 아내가 일어선다.
이미 햇빛이 사라진 저녁, 분수대를 뒤로 하고 아내가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을 남편이 지켜본다.

어느 순간... 흠칫 놀란 남자의 입술이 살짝 열린다.
미간에 잠시 주름이 잡히다가 펴지더니 얼굴 어딘가에서 시작된 미소.
서서히 얼굴 전체로 번져간다.
어둠 속에서 동공에 무언가가 반짝인다.

“...집에... 갑시다.”
“맨날 오던 금동이가 안 와서 사료가 남았어요.”
“내일 오겠지”
남편이 가는 오른쪽으로 여자가 다가가 나란히 걷는다.
남자가 살짝 고개를 돌려 아내를 올려다본다.
짧게 쳐 올린 뒷머리가 초겨울 바람에 추워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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