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있었던 것 같은 어떤 일이 날짜를 확인해보면 실제로는 2019년에 일어난 경우가 더러 있다. 기억이 2019년에서 2021년으로 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 삶 속에서도 2020년의 존재감이 희미하다는 것을 근래 자주 깨닫고 있다. 시간은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며 실제로 경험한 사건들의 기억을 통해서만 시간이 기억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일 년 가까이 가지 못한 곳, 만나지 못한 사람, 하지 못한 것들이 떠오른다. 그런 부재가 삶의 흐름을 끊고 분명히 존재했던 시간을 기억에서 지운다. 그 부재 가운데 내게 크게 다가오는 것을 하나 꼽는다면 연극, 발레 등을 보러 다니던 문화생활의 중단이다.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모습으로 이 시기를 지나가고 있을 텐데 시급한 문제가 쌓여 있는 다른 곳에 비하..
1.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는 예술가 어쩌다가 시리즈가 되어버린 이 글은 드가의 화가로서의 궤적을 좇고 있다. 1편에서는 카메라가 회화의 영역을 본격적으로 침범하기 전에 드가가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우연, 즉 ‘적당한 때’를 잡은 행운에 대해, 2편에서는 당시 대중이 사랑하는 발레를 늘 접할 수 있는 파리에 살았던 우연, 즉 ‘적당한 장소’에 있었던 행운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고난 재능에 더해 행운까지 겹쳐 드가는 예술가로서 드물게 생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이 아닌 100년도 넘는 과거의 이야기이다. 당대의 성공이 반드시 후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늘날까지 드가의 명성이 유지되는 것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는 ..
발레라는 소재 드가는 19세기 사람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인이다. 상상하건데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드가는 파두 가수를 그리고 있었을 것이고, 아르헨티나 화가인 그는 아마도 탱고 댄서를 화폭에 담았을 것이다. 드가는 19세기의 프랑스인 구체적으로 파리에서 활동한 화가였기에 파두, 탱고, 플라멩고 대신 발레를 접하게 된 것이다. 이 발레라는 소재의 선택이 드가를 당대의 성공한 예술가로, 사후에는 길이 기억되는 인상파의 대가로 만들어 주었다. 은행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삶을 살았으나 아버지의 사후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친 드가는 팔릴 만한 그림을 그려야 했고 그때 눈에 들어 온 소재가 발레리나였다. 파리에는 유명한 파리오페라발레극장이 있었다. 예술적 탐구와 경제적 동기를 모두 충족할 소재가 필요했던 한 화가가 ..
발레를 열심히 보러 다니던 시절, 발레무용수 인스타그램 계정을 다수 팔로우해 둔 후로 지금도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홈에 발레 사진들이 주르륵 뜨곤 한다. 전세계 발레단이 공연 홍보를 위해 올린 영상들도 무척 많고, 무용수 개인이 게시하는 사진, 전문 사진작가들의 사진도 많다. 올해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문화계도 타격을 받아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었지만 예년같으면 매 정기공연마다 일반 관객들이 찍은 커튼콜 사진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문득 150년 전 파리오페라발레극장에서 발레리나들을 그리던 드가가 우리 시대로 찾아와 붓 대신 카메라를 든다면 그는 이번에도 과거와 같은 성공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스치고 갔다. 직업사진가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카메라 달린 스마트폰 하나쯤 모두 갖고 다니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6월 한낮, 오래 전에 푸른 빛을 띠게 된 숲은 한층 색이 짙어지고 아침부터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 매미 소리가 더위 속에서 자장가처럼 들리던 어느 날, 어떤 남자 한 명이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입구에 들어섰다. 그 남자는 10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한 후 오늘 만기 출소하여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짧은 머리, 거칠어진 피부, 불안한 눈빛 무엇보다 시대에 크게 뒤진 유행지난 옷차림이 이 사람이 여느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집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크게 휘어지는 S자로 약 1킬로미터 가량 되는 거리이다. 길 왼편으로는 개울이 구불구불 흐르고 오른편은 산자락과 닿아 있다. 중간중간에 길 가의 커다란 바위, 개울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 물가의 버드나무 따위가 단조로운 ..
베아트리체 첸치 Beatrice Cenci 스탕달 증후군 : 아름다운 그림 같은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어지러움, 환각 따위를 경험하는 현상.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를 방문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보고 난 후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 채호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스며드는 셋방에서 선잠을 잔 탓에 피로가 풀리지 못한 몸이 이불에서 쏙 빠져나올 때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이미 건강상 이유로 월요일에 결근 했으므로 이 날은 웬만하면 출근해야 했다. 그리고 어쨌든 오늘은 금요일이고 퇴근하면 예술의전당에서 연극을 볼 예..
후광(後光) 거실 테이블을 ㄱ자로 둘러싼 소파 한쪽에 초로의 부부가 가까이 붙어 앉아 있고 조금 거리를 띄운 자리에는 젊은 아가씨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 세 사람 모두 표정이 어두운데 자세히 보면 부부가 아가씨의 눈치를 보고 있다. 드디어 나이든 부인이 어렵게 말을 꺼낸다. “아가, 이제 그만하면 됐다. 그 사람과는 인연이 아니었던 게지. 대체 밥도 안 먹고 물까지 안 마시고 엄마 아빠 앞에서 뭔 짓이니!” 머리가 반쯤 하얗게 센 남자가 아내의 말을 조심스레 받는다. “너 그날 후로 너무 오래 집에만 있었어. 그래서 더 우울한 거야. 오후에 날 풀리면 애비랑 같이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 “...” 딸은 말이 없지만 그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리고 이미 떠난 사람은 다 그럴 만해서 그렇..
돌연 긴장된 공기가 얼음처럼 굳어 회색쥐 한마리를 그자리에 가두었다.고양이 한 마리가 아까부터 쥐를 조준하고 있다.고양이는 다 자랐어도 불과 이십여 센티미터, 자신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쥐는 당당하게 고양이를 노려본다.수염을 실룩거려 쥐까지의 거리와 각도를 계산하는 고양이와 길고 날카로운 앞니를 꺼내는 쥐의 짧은 대치뒷다리가 몸을 밀어내는 속도에 체중을 실어 고양이는 회색쥐에게 대포알처럼 날아가고, 그 충격에 쥐가 벌렁 뒤로 넘어가며 찍 찍 소리를 내지른다.땀을 흘리듯 피를 덮어쓴 회색쥐의 몰골이 싸움의 결과를 드러낸다.그러나 쥐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고양이 송곳니를 목덜미에 받아들이기 전에 단검같은 자랑스러운 앞니를 고양이 쇄골 밑에 박아넣었다.고양이의 오른쪽 빗장뼈 아래에서도 쉴새없이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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